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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연설

최고의 명 연설, 존F. 케네디(John F. Kennedy)의 대통령 취임당시 연설

by 일탈러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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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1961년 1월 20일, 미 대통령 취임연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f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에 태어나 1963년 11월 22일, 총탄에 쓰러지면서 한 편의 영화같은 삶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타고난 연설가로 손꼽습니다. 부유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훌륭한 외모의 젊은 대통령. 이러한 그의 조건은 대중에게 다가가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을것입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시대적 특징과 낙관주의적 정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들과 교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질과 경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케네디가 상대적으로 젊다는 점, 그리고 경험이 없다는 점은 그를 낙천적이고, 참신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휘하던 초계정이 솔로몬 제도 인근에서 침몰하자 부상을 무릅쓰고 가까운 섬까지 병사 한명을 끌고 와 생명을 구했고, 부하들의 안전을 일일이 확인했었습니다. 케네디가 몸소 실천한 애국심과 자유, 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청중은 기꺼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청중에게 분명한 비전과 도전의식을 불어넣었습니다.

케네디는 자신의 형신주의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극적이고 강력한 말로 취임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최초의 혁명의 계승자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는 전쟁으로 강해지고, 힘겹고 가혹한 평화로 단련되고, 오랜 유산에 자부심을 갖는 젊은 세대들의 손에 그 혁명의 횃불이 쥐어졌음을 압니다. 우리는 미합중국과 전 세계가 함께 현재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헌신적으로 수호하려는 인권이 점차 유린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와 우방과 적들에게 알립시다."

 

케네디가 1962년 9월 12일, 라이스 대학교에서 했던 연설입니다.

"루니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또 다른 일도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목표가 우리가 가진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정비하고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루지 않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케네디의 많은 연설에는 행동하고 도전하라는 적극적인 요구가 담겨 있었고, 모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씁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설정된 대담하고 과감한 목표는 흥분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상상력에 불을 지피기 마련입니다.

 

가장 적절한 도구와 기술을 이용해 최고의 효과를 내어야 합니다.

케네디는 다수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상대적으로 새로운 매체인 TV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1960년 9월, 대선 캠페인 중에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TV로 중계된 대선토론에서 공화당 후보이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1:1 대결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케네디의 승리였습니다. 라디오로 이 토론을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를 TV로 지켜본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던 닉슨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케네디가 진정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또한 중요해서는 안되지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외모' 에서 상대보다 뛰어났습니다.ㅋ)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대결의 승패를 가른것으로 평가되는 당시의 대선토론 이후, TV라는 매체는 미국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중의 마음을 이해하고 당신이 그들의 지지자임을 보여주여야 합니다.

"Ich Bin ein Berliner." 이 말은 독일어로 '나는 잼이 들어 있는 도넛입니다.' 라는 뜻이다. 케네디는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 인구의 80% 이상이 운집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케네디가 멀리 독일까지 와서 왜 자신을 도넛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Berliner)' 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서독 청중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서독인들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독일어에 서투르다는 결점도 덮어 주었습니다. 그의 실수는 귀엽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본인이 훌륭한 연설문을 쓸 수 없다면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합니다.

케네디는 훌륭한 연설가였지만, 뛰어난 작가들로 이루어진 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케네디의 측근 보좌관, 테드 소렌슨 이었습니다. 한 세대의 상상력에 불을 뭍인 건 바로 소렌슨의 표현이었고, 케네디는 이렇듯 훌륭한 표현을 세상에 멋지게 선보였습니다. 소렌슨은 그가 저서에서(카운슬러(Counselor) 커뮤니케이터로서 케네디의 자질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무언가 기억에 남을 일을 해야 합니다.

케네디의 인생은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최대 갑부로 손꼽히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점에서부터 전쟁영웅, 상원의원, 최연소 대통령이 된 사실까지 모두 인상 깊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는 청중은 자신이 이미 그를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그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청중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그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갖고,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흥비롭게도,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 동안 입법사으이 성과는 거의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제안한 획기적인 입법안의 대부분은 그의 사후에 실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특이하게도, 대통령 케네디의 유산은 구체적인 성과가 아닌 포부와 기백, 도전과 강인함, 그리고 그의 고귀한 성신이라고 표현됩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유산은 정치적인 입장과는 관계없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각계의 지도자들은 그의 연설문과 연설을 배우고, 익히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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